『역사 디자인하기:문서와 권력을 이루는 불변의 형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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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딩 디자이너, 로고 디자이너, 서체 디자이너, 포스터 디자이너, 북 디자이너.
그리고 스타 브랜딩 디자이너, 스타 로고 디자이너, 스타 서체 디자이너, 스타 포스터 디자이너, 스타 북 디자이너.
그런데
왜 '문서 디자이너'라는 말은 없을까?
우리는 좋은 미감, 안목, 높은 감도 를 칭찬합니다. “좋은 미감을 가지셨네요.” 참 듣기 좋은 말이에요.
이 칭찬은 종종 이렇게 들리기도 합니다."당신은 좋은 미감을 향유할 만큼 부유한 사람 같네요."
어느 때보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시대, 그리고 어떤 디자인에 둘러싸여 살아가는가로 가진 것을 증명하는 시대인만큼, 우리는 아름다운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잘 만들어진, 잘 디자인 된 모든 것들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는 종종 (어쩌면 자주) 그런 것들을 디자인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말.이.죠, 생각해보니 부동산 계약서를 디자인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네요!
마치 이런 상황...
『역사 디자인하기』은 디자인의 결과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영역인 문서에 주목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디자인 역사와는 다른 계보를 그려냅니다. 저자 크리스 리는 그래픽 디자인 역사가 주로 유명 디자이너와 대표작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음을 비판합니다. 이런 식의 서술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널리 알려지는 작업만을 우선시하며, 디자인 역사를 특정 작품과 인물 중심으로 좁혀 왔죠.
책은 세금 신고서, 계약서, 여권, 화폐 같은 문서들을 그래픽 디자인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와요.문서는 오랜 시간 동안 동일한 형식과 효력을 유지해야 하고, 이러한 요구가 문서 디자인을 움직여 온 핵심 동력이 됩니다. 저자는 이처럼 변하지 않는(immutable) 형식이 지속되도록 만드는 과정 속에서 디자인이 작동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디자이너만을 위한 책인 건 아니에요.정치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동사무소, 공항, 경찰서, 법원, 놀이공원 키 재기 판, 병원, 은행 등의 장소에서 불편해 본 적 있거나, 쫄아본 적 있다면, 혹은 안정을 느낀 적 있다면,그리고 문서더미가 자아내는 왠지 모를 섹시함 혹은 만족감을 아는 사람이라면, 문서의 형식이 어떻게 행정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해 왔는지를 드러내는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만약 디자인의 역사를 다시 쓴다면, 그 목차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역사 디자인하기』는 유명 디자이너의 이름 대신 문자를 만드는 기술, 측정과 표준화, 인쇄 시스템, 케이블과 암호화 등을 중심으로 디자인의 역사를 다시 구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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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책을 소개합니다."
유연성클럽에서 지난 해 출간했던 『앙트레프레카리아트』의 저자 실비오 로루소가 『역사 디자인하기』를 소개하는 멋진 글을 써 주었습니다. 글 제목 「단기 임대 계약의 은밀한 매력」 은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1972)」을 패러디한 것입니다.(지면 상 모든 글을 옮길 수 없어 편집자가 부분 수정 하였습니다)
실비오의 편지를 함께 읽어보아요.
단기 임대 계약의 은밀한 매력
글. 실비로 로루소
우리 잠시만 잡지, 로고, 세련된 서체는 잊어 보자. 대신 고지서, 동전, 스프레드시트, 여권, 쐐기 문자 점토판, 암호화 원장 같은 것들, 그러니까 ‘문서’에 관한 생각을 해 보자.
디자이너, 디자인 덕후, 디자인 연구자, 디자인 애호가 라면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 그래, 그런 평범하고 진부한 제작물을 ‘디자인’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민망한 구석이 있긴 하다. 대부분 따분하고, 또 어떤 문서들은 형편없기까지 하니까.
이런 것들에 대해 디자인 관점에서 이야기할 만한 게 있긴 할까? 관료제 연구로 잘 알려진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서류 업무는 지루할 뿐 아니라 “지루하도록 만들어져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니까 문서는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매력도, 상징적 깊이도 없어 보이는 이런 문서들이 실제로는 권력과 강제력이 행사되는 지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서들은 정당화된 폭력과 매우 가까이 있다.
『역사 디자인하기(Designing History)』의 저자 크리스 리는 문서가 일종의 ‘아우라’를 지닌 존재임을 주장한다. 문서에는 마치 사우론의 응시처럼 느껴지는 권위와 지배의 감각, 즉 헤어샤프트(Herrschaft, 지배 권력)의 촉감이 스며 있다. 문서가 보여주는 투명성과 균질성은 오히려 권력이 지닌 불투명함과 복잡성을 드러낸다. 단지 ‘기능적’이라 여겨지는 절차와 행위들은 제도의 상징적 구조 위에서 작동하며, 이 제도는 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상태가 지속되도록 스스로를 유지한다. 이런 맥락에서 크리스 리가 지적하듯, 문서 디자인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은 ‘불변성(immutability)’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수십 년 사이 서구에서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시공을 가로질러 무차별적으로 확장하는 일이 흔해졌다. 서구 근대의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디자인’의 사례로 샤베 동굴 벽화에서 잉카의 키푸까지 묶어 버리는 식이다. 이러한 확장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디자인 이해를 실제로 바꾸어 놓을 구체적인 관점을 동반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그게 아니라면 현재가 만들어 낸 안개가 역사에 대한 인식을 흐릴 뿐이다. 크리스는 수메르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 디자인 역사를 문서 역사의 틀로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이 틀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현재처럼 보고, 현재를 과거처럼 다시 본다.
저자는 역사를 건조한 사실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증거를 해석해 구성하는 하나의 서사로 이해한다. 이렇게라면 디자인에서도 ‘스토리텔링’을 진지하게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생기는 난관이 있다. 이 책이 다루는 대상은 증거, 곧 문서이기 때문이다. 문서는 단순히 역사 속에 존재하는 걸 넘어 스스로가 역사가 되려 한다. 크리스의 이론적 여정은 복합적인 경로를 따라 전개된다.
그는 문서를 사료로 삼아 디자인 역사를 다시 사유하는 동시에, 문서 자체를 역사화하려 한다. 그는 단순히 기존 디자인 정전을 확장하거나 해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러한 정전이 형성되는 방식 자체, 다시 말해 정전을 만들어내는 역사 서술의 틀을 다시 생각할 것을 제안한다. 포스트포디즘 이후 등장한 자신의 이름과 스타일을 브랜드로 내세우는 소부르주아(petty bourgeois) 디자이너와 그들이 생산하는 홍보 디자인 작업에만 주목하기보다, 우리 주변에 산재한 문서의 잔해를 보라는 것이다. 디자인 역사에서 말해온 ‘기록의 공백’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특정 디자이너가 만든 포스터 작품보다, 이러한 문서 영역에 존재한다.
『역사 디자인하기』 영문판 이미지 (출처: Set Margins)
한 레딧 사용자가 제안한다. “법의 권위를 흔들기 위해 코믹 산스(Comic Sans) 합법화를 추진하기 보다는, 법률 문서에 코믹 산스를 쓰자.” 이 책을 읽다 보면,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통해 스스로 권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디자이너들은 지폐를 정교하게 디자인하거나 옛 계약서에 장식적 필기체를 더해 문서를 더욱 공식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이도록 만드는 일을 하니까.실제로는 그 반대다. 불변성이 각인된 권리와 주장에 장식을 덧씌우는 것은 디자인이 아니라, 스스로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권력이 휘둘러대는 욕망이다. 권력이 디자인을 정당화하는 것이지, 디자인이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조악함을 넘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문서 디자인조차 우리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제도적 권위는 코믹 산스 같은 서체도 굉장히 진지해 보이도록 만들 수 있다. 2012년 CERN의 힉스 보손(Higgs boson) 발견 발표를 떠올려 보라.
힉스 보손 발견 발표 자료 PPT 이미지: 2012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힉스 보손 입자 발견을 발표할 때,자료 일부가 Comic Sans 서체로 작성되어 세상이 난리도 난리도 아니었어요.
디자이너에게 남은 건 뭘까? 크리스는 세금 신고서를 디자인하는 일을 꿈꾸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다소 울적한 듯 이야기한다. 그래도 요제프 뮐러브로크만(Josef Müller-Brockmann)부터 카스텐 니콜라이(Carsten Nicolai)까지, 스타일 차원에서는 가히 페티시라 여길만큼 규격, 그리드에 매혹된 이들은 꾸준히 있어 왔다. 물론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반제국주의 투쟁에 기여할 생각으로 디자인 학교에 진학하는 학생 역시 많지 않다. 그렇다고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할 것도 아니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입장을 표출하는 자체가 전문성의 표식이 되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체제를 교란시키겠다는 사명을 품고 디자인 학교에 가려는 사람 역시 거의 없을 것이다.
형식을 통해 유지되고 정당화되는 권력의 방식이 드러날 때, 디자이너에게는 또 하나의 실천 가능성이 열린다. 위조를 통해 잠시나마 권력의 형식을 따라해 보는 것이다. 크리스의 관점에서 보면 위조는 단순한 사례나 일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디자인 실천이다. 이러한 실천은 네덜란드 나치 점령기 동안 빌럼 산드베르흐(Willem Sandberg )가 벌인 불법 인쇄 활동처럼 영웅적 에피소드로만 회자되어 온 사례들을 보다 넓은 이론적 맥락 속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이런 시각으로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그래픽 디자인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역사 기록을 수정하는 장면에서는 ‘위로부터의 위조’를 볼 수 있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는 기정이 오빠의 취업을 돕기 위해 대학 졸업장을 위조하는 장면에서 ‘아래로부터의 위조’를 확인할 수 있다(오빠 기우는 “너는 왜 이 좋은 실력으로 미대에 만날 떨어지냐.”고 묻는다). 그리고 『역사 디자인하기』에서는 위조를 하나의 정당한 디자인 실천으로 제시한다.
크리스의 작품 세계 안에서 디자인은 단순히 기술적이거나 표현적인 실천에 머물지 않는다. 이 실천은 정치가 가시화되기 이전(pre-political)의 층위, 곧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과 장치를 형성하는 차원에서 작동한다. 다시 말해 디자인은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무대 위의 행위라기보다, 그러한 행위가 가능하도록 무대를 조직하고 배치하는 역할에 가깝다.
『역사 디자인하기: 문서와 권력을 이루는 불변의 형식들』을 읽다 보면, 우리에게 밴 관료적 습관 때문에 화려한 포스터나 잡지보다 고지서와 스프레드시트의 음울한 매력에 더 끌리게 될지도 모른다.‘지루한 문서들’에 깃든 ‘불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디자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달라지고, 디자인 역시 변화한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도록 설계된 책이 아니에요. 이쯤 되니 유연성클럽에서는 일부러 첫 페이지부터 읽을 필요가 없는 책만 내는 것 같지만... (『창작하는 이들을 위한 연구』 참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요! 『역사 디자인하기』는 문서와 권력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기보다, 백과사전적인 편집 방식을 통해 (아래 이미지 참고) 서로 떨어져 있는 역사적 장면들, 문서와 제도들이 어떻게 권력과 신뢰를 안정시키는 장치를 공유하는지 보여주려는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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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책의 디자인도 조금 독특합니다.본문 페이지 번호는 우리가 익숙한 것처럼 1, 2, 3… 순서대로 진행되지만,
도판 번호는 반대로 줄어듭니다(아래 이미지 참고).
또 책 곳곳에 등장하는 화살표(아래 이미지 참고)는 서로 떨어져 있는 페이지들을 연결하고, 책 앞뒤를 오가며 읽도록 안내하는 작은 힌트입니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도 조금 다릅니다. 본문, 캡션, 사이드노트, 도판이 엄격하게 구분되기보다는 서로 섞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듭니다.
그래서 『역사 디자인하기』는 전통적인 학술서라기보다, 문서와 권력의 역사를 탐구하는 비주얼 에세이에 가깝습니다.여러분이 페이지 사이를 오가며 서로 다른 장면들을 연결하고, 그 사이에서 그 장면들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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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디자인하기: 문서와 권력을 이루는 불변의 형식들